2024 연분홍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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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추억과 동심을 표현하려는 소망은 미술사에 등장한

위대한 거장들이 화업의 마지막 단계에서 진입하던 세계이다.

입체파 화가 피카소가 무려 40년에 걸쳐 도달하고자 했던

자유자재의 영역도 동심의 세계였다. 동심으로 그린 그림은

그리는 사람은 사라지고 대신 그림만 남는 것. 그것은 화가가

잘 그려야겠다는 욕심을 전부 내려놓고 오로지 마음 가는

대로 그릴 대상만을 생각했을 때 가능한 세계다. 이것은

노자가 ‘도(道)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라고 했던 무위

(無爲)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한다. 무위 즉 ‘하는 것이 없다’

는 것은 인위적인 기교인 사람의 흔적을 남겨놓지 않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아무리 솜씨가 뛰어난 장인이라도

자연이 이루어놓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세계는 따라갈

수가 없다. 사람이 만든 옷은 바느질 자국이 남기 마련인데

하늘에서 지은 옷은 그 자국이 없이 완전무결하다. 이것이

자연이다. 화정이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가

바로 그 자연스러움이다. 화정은 천의무봉을 위해 <어락도>의

힘을 뺏다. 문인화가라는 역할을 내려놓고 대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잠시 화가의 손을 빌려주었다. 그는 정신세계가 맑아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그 소재와 화풍에 따라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화사한 채색의 풍속화이다. 여기에서는

여인과 소가 들녘을 배경 삼아 등장한다. 특히 여인의 등장은

화정의 이전 작품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소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머리에 들밥을 이고 가거나, 아이를 업거나

나물을 캐고 밭일하는 아낙네가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동심 I>에서는 머리에 광주리를 인 여인과 나무 옆에서

대화하는 두 여인 그리고 누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며 한가롭게 앉아 있다. 구륵(鉤勒)으로 간략하게

그린 나무에는 주먹만 한 꽃송이들이 매달려 있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 듯 꽃잎이 화면 곳곳에 휘날린다. 대상의 형태를

굵은 윤곽선으로 그리는 구륵법(鉤勒法)은 윤곽선 없이

색채만으로 형태를 그리는 몰골법(沒骨法)과 함께 동양화의

오래된 기법 중의 하나다. 그런데 <동심 I>에서는 동양화의

기법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는 듯하다.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세련된 기교가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순수함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다.

두 번째 그림은 채색으로 그린 풍경화이다. 판화지에 채색으로 그렸다는 점에서는 첫

번째 부류와 동일하지만 인물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풍속화가 아닌 풍경화로

분류된다. 그중에서도 고목 위에 까치가 두 마리 앉은 <봄소식>은 소재와 배경이

분리되지 않을 정도로 반추상에 가깝다. 눈 내리는 겨울밤 늙은 매화나무 위에 까치가

앉아 있는 <春風園裏君先發, 月夜慇懃對美人>에서는 조선중기의 조속(趙涑)과

조지운(趙之耘) 부자가 선보였던 화조영모도의 전통이 느껴진다. 화정은 기존 문인화의

틀을 가져오되 새롭게 자신만의 색채를 물들이고 현대적으로 변용함으로써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 결과 화선지에 먹을 부려 필력과 필묵으로만 묘사하던 문인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서정성이 돋보인다.

화정이 그린 목가적인 풍경은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농촌에서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자연의 변화를 매 순간 경험할 수 있다. 계절마다

바뀌는 산과 들녘, 논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람들과 공간을 함께 쓰는 소와 닭과

개와 고양이 등을 지켜보면서 자란다. 그만큼 화가에게 그림 그릴 소재를 많이 제공한

셈이다. 화정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봤던 풍경들을 아낌없이 선보였다. 판화지와

채색은 그런 풍경을 풀어내는데 가장 적절한 매재였다.

동심 I 38 x 29

봄소식 25 x 35

春風園裏君先發(춘풍원리군선발)

月夜慇懃對美人(월야은근대미인)

30 x 40

김무호도록_20240301.indd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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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2 오후 12: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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