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화풍이 변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작품세계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그 지점을 중심으로 시기를 나눌 수 있다.
이를테면 피카소의 작품을 청색시대, 장미시대, 입체파시대 등으로 나누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물론 한 시기의 화풍이 다음 시기로 넘어갈 때 앞 시기와 단절될 정도로
갑자기 확 바뀌지는 않는다. 앞 시기의 화풍은 다음 시기의 화풍과 맞물려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서도 앞 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화풍으로 변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럴
때 미술사가들은 그 작가의 작품이 변하게 된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화풍이 변한다는 것은 작가의 심리상태가 변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심리상태의 변화가 어디서 기인하는 지 내적, 외적인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 새로운 경향의 그림,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겪는 등 외적인 원인이
발생하면 작가의 화풍은 변할 수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에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되면 작가의 심리는 요동친다.
결혼이나 출산, 질병이나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 등의 내적 원인도 작가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분석하는 노력은 작가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화가의 언어는 소리가 없는 그림이다. 그림은 언어가 다르더라도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만국 공통어이다. 그러나 소리가 없다는 것은
자칫 오독의 결과를 낳을 수가 있다. 화가가 아무리 절실한 언어로 말을 해도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굳이
해석이 필요하지 않는 화정 김무호 화백의 작품세계에 대해 사족같은 글을 덧붙이는
이유는 이번 전시회가 그의 화력에서 터닝포인트가 되기 때문이다.
조정육
(경상국립대,『그 사람을 가졌는가』저자)
- 일필휘지의 문인화가가 연분홍빛 채색화가로 변심하게 된 까닭은
이번 전시회의 특징은 화정이 자신을 문인화가로만 규정했던 기존의 한계를 과감하게 탈피했다는 데
있다. 색채는 더욱 밝아졌고 화사해졌으며 따뜻해졌다. 이런 변화에 대해 그의 작품을 본 어떤 관객은
‘나이 들면 세상을 받아들이는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물론 그의 기존 작품에서도 강렬한 원색과 화사함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색채는 어디까지나 필력을 드러내기 위해 부차적으로 선택한 재료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
년에 제작한 초대형 <어락도>라 할 수 있다. <어락도>는 강렬한 오방색이 특징이지만 이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색채가 아니라 일필휘지의 필력이다. 마치 서예를 하듯 거침없이 내리그은 붓질의
흔적은 오방색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대담하다. <어락도>에서 보여 주고자 했던 필력은 무릇 붓을
잡은 문인화가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도달하고 싶은 세계였다. 그때 작가의 관심사는 오로지 필력에만
집중되어 있는 듯 싶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어락도>에서 뿜어져 나오던 엄청난 에너지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다. 대신
언제 그런 역동적인 그림을 그렸냐는 듯 딴청을 부리며 동화(童畵)같은 그림을 선보인다. 색채는 원색이
아니라 두세 가지의 색을 섞어 차분하면서도 산뜻하다. 그 효과를 위해 작가는 화선지가 아니라 판화지를
사용했다. 화선지는 한 번의 붓질만을 허용하는 대신 판화지는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이 가능하다.
필선은 마치 어린아이가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그린 듯 어눌해 도무지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화정은
심지어 이번 전시회의 제목을 초등학생이 쓴 글씨로 꾸미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유년시절로 돌아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떠나 자신이 보고 경험했던 것만을 그리고 싶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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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호도록_20240301.indd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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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2 오후 12: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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